권석하 IM컨설팅 대표 
2005년 7·7 런던테러 이후 다문화주의 실패 자각
금융위기 이후 국가재정 악화 국민 불만 해소할 희생양 필요
금융위기 이후 국가재정 악화 국민 불만 해소할 희생양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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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4월 영국 정부의 강화된 새 이민정책에 반대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외국 노동자들. photo 조선일보 DB |
캐머런 총리의 발언 후폭풍은 거셌다. 야당은 캐머런이 아예 극우단체의 행동 강령을 대신 써 준 셈이라고 비난했다. 무슬림들은 싸구려 정치 점수 몇 점을 얻으려고 영국 사회를 갈갈이 찢으려 한다고 반발했다. 극우 쪽에서는 드디어 캐머런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오고 있으며 ‘그가 한 말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말’이라고 반겼다.
유럽 다문화주의 실패론 시초는 캐머런
캐머런과 메르켈의 다문화주의 사망 공동선언에 바깥세계는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국에 사는 필자에게는 새롭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동안 유럽 각국에는 집시 추방, 학교를 비롯한 공공장소에서의 무슬림 의상 부르카 착용 금지, 이슬람사원 첨탑 건설 운동 반대가 있어 왔다. 특히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조차 미국 9·11 사태 이후 종교 증오 범죄가 600%나 증가한 것을 보면 유럽의 우풍(右風)은 이제 미풍이 아니라 태풍의 단계로 들어선 듯하다.
따지고 보면 다문화주의 실패론에 대한 연고권은 캐머런에게 있다. 2005년 야당 당수로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그는 다문화주의 실패론을 먼저 얘기했다. 그해 7월 7일 런던 자폭 테러로 범인 4명을 포함한 56명이 죽고 700여명이 다친 뒤였다. 그래도 당시로는 상당히 용감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2년 뒤 총선에서 집권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던 2008년, 그는 이번 발언과 단어 한두 개만 다른 다문화주의 실패론을 다시 주장했다. 그때는 집권당 당수가 아니어서 그렇게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총리로서의 이번 발언은 반향이 달랐다. 영국 국민에게 보수당 정책은 원래 반(反)이민적이어서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정책에 어긋나는 단체에는 예산을 주지 않겠다며 정책 수행자로서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한 터라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출신 이민자에 대한 정치인을 비롯한 영국인의 그동안의 태도는 참 어른스러웠다. 하긴 한때 세계 각처의 식민지를 경영하던 대국으로서 이민자를 대하는 노하우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영국에서 30년을 살면서 피부로 직접 인종차별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마음속으로야 인종차별을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찌되었건 결코 당사자가 못 느끼게 생각 속에만 담아 두는 사회적 합의의 자제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책임 있는 영국인, 특히 정치인이 공사의 자리를 막론하고 인종차별 발언을 할 경우 정치적 자살뿐 아니라 인격 파산도 동시에 각오해야 한다. 인종차별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은연중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마저 “그런 것을 그렇게 꼭 입 밖으로 내야 했느냐”는 힐난을 받으며 “같이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경솔한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이민자 지원이 테러 자초
어른스럽다는 말은 능청스럽다는 말과 통한다. 속내야 어떻든 그래도 유럽 국가들 중에서 제도권 정치인들이 대놓고 인종차별 얘기를 하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가 영국이다. 그런 영국에서 거의 인종차별과 같은 발언이 이제 봇물을 터뜨린 것처럼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놀랄 일이다. 그것도 제도권 밖의 정치인이 아니라 현직 총리의 입을 빌려서 말이다.
유럽 백인들의 우월 의식은 오래된 것이라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유럽인들이 인종차별 혐오나 다문화 포용, 혹은 민족 간 융합에 신경을 쓴 것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둔 이유도 있고, 산업혁명 때부터 궂은일을 할 외국노동자를 각국에서 불러들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죄값임을 자각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달갑지는 않으면서도 다문화주의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1981년 남부 런던 브릭스턴(Brixton) 지역에서 발생한 흑인폭동 이후 영국 사회와 정치는 아주 큰 변화를 겪으며 다문화주의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 이후 영국은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많은 조치를 취했다. 캐머런 총리가 이번에 얘기한 것처럼 “수많은 정부 기관들이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를 수많은 언어로 번역해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 써 그들로 하여금 영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도 일상을 영위해 갈 수 있게 부추겼다”고 후회할 정도로 다문화주의를 품으려고 노력했다. 각국에서 오는, 자신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망명자들을 심사 기간 몇 년간 국민의 세금으로 먹이고 재우고 했다. 지금도 탈북자 다수가 이런 혜택을 받고 있다. 심지어는 무슬림사원에서 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적으로 하는 성전(聖戰)을 선동하는 극단주의 성직자들마저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도움을 받았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원은 이뿐이 아니다. 이민자 사회가 자신들의 전통 축제를 위한 시설 사용 혹은 자금 지원을 요청하면 지방정부는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반(反)영국적인 단체일지라도 이민자 단체라는 명목만 있으면 지원금을 요청해도 거절하면 안될 정도였다. 이민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교들은 영국의 학제를 굳이 따르지 않고도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했고 물론 교육보조금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런 학교들이 영어나 영국 문화를 가르치지 않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종교만 가르쳐 주류사회와 담을 쌓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이런 곳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이민 2세대가 7·7 런던 자폭테러의 주범이라는 사실로부터 자신들이 정성을 들인 다문화주의가 실패라는 자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수당 ‘이민자’ 내세워 위기 탈출?
- ▲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photo 조선일보 DB
이를 보면 보수당의 정책은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사실 정치인들이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잡아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생리이긴 하다. 외부의 적을 찾아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 그런 적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내부에서라도 없는 적을 만들어 내는 게 정치인의 습성이다. 물론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유럽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행패가 유럽인으로 하여금 공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한 것이 사실이다. 네덜란드에서 살해된 영화감독 테오 고흐를 비롯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희화했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아 거의 30년을 밤낮으로 경찰 보호를 받고 사는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 같은 유명인을 굳이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일반 무슬림인들, 특히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서는 양식 있는 유럽인 누구나 공분을 느낀다. 여동생이나 딸이 비이슬람신자를 애인으로 두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자행하는 명예살인, 비인간적인 여성할례, 미성년의 어린 여자 아이를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 시키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가는 행위 등은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몸담고 사는 나라들의 가치관과 문화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다.
미국을 시발로 한 금융위기 때문에 유럽 각국 정부는 긴축재정을 펼 수밖에 없다. 특히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영국 보수당 정부는 금융위기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대의명분이 있어 현재 아주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러나 삶에 찌든 일반 국민로서는 여기저기서 불만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찾은 희생양이 다문화주의인 측면도 있다. 주류문화와 융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살아온 행태 때문에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돌리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원래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는데 영국의 인심이 각박해진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非)유럽 이민자에 대한 쿼터가 생긴 지도 상당히 되었고, 그래서 한국식당이 한국 요리사를 못 구해 어려움을 겪기도 일쑤다. 굴지의 한국 기업 런던 지사장이 비자를 못 받아 몇 달씩 부임이 늦어지는 일은 이제 얘깃거리도 못 된다.
한국도 다문화사회 대책 마련 시급
필자가 영국에 온 1980년대 초 영국은 어수룩하다 못해 구멍투성이였다. 친절과 관용이 철철 넘치는 나라였다. 외국에서 온 여행자도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정말 묻지도 따지도 않고 치료해 주었다. 신분증 보자는 소리는 물론 의료보험증마저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는 중병에 걸려 수주일 입원한 환자가 퇴원해도 돈은 물론 서류 한 장에 서명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영국 국민이건 외국여행자이건 마찬가지였다. 병원과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면 되었지 그런 행정적인 절차를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게 철학이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특히 개인의료보험이 없으면 해산 비용이 어마어마한 미국 임산부가 영국에 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녀를 입학시키러 가면 ‘여권 갖고 와라’ ‘비자가 있냐 없냐’고 전혀 따지지 않았다. 자리가 있으면 정말 아무런 서류 한 장 없이 받아주고 학용품에 점심까지 주면서 가르쳐 주었다. 학교는 배움을 원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지 그 학생의 비자 소지 여부는 학교가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정신이었다. 정작 자신의 조국이라는 한국에 돌아가서 아이를 입학시키려니 제출해야 할 서류가 수십 가지라고 화를 내는 시절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영원히 지나간 것 같다. 자격 있는 사람만 치료해 주고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정말 이제는 어디서나 아주 까다롭게 따진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거의 120만명에 가깝고 한국인과 결혼해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18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다문화주의·다문화사회는 생소한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얘기하는 다문화주의와 유럽에서 용도폐기 운명을 맞고 있는 다문화주의는 몸은 한 몸이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샴 쌍둥이다. 우리는 이제서야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적응하여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끔 노력하는 단계에 와 있는 데 불과하다. 우리들의 이런 노력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 유럽이 겪고 있는 이민자들 때문에 오는 어려움을 우리도 반드시 겪는다는 것이다. 특히 단일민족을 자랑으로 삼아왔던 우리에게는 이민족을 받아들여 공존했던 전통이 없다. 얼마 전 이주가정의 자녀 중 취학연령 아동(3만1635명) 중 83%가 학교를 못 다니고 있고, 학교를 다니더라도 중도에 포기하는 비율이 초등생 15.4%, 중학생이 39.7%, 고등학생이 69.6%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않고 있는 다문화가정·다문화사회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정말 시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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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세.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 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
